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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자료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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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운동의 개요

14세기 후반부터 일어난 신이 모든 것의 중심인 기독교의 신본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이 모든 것의 척도였던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시절로 회귀하려 한 운동이다. 14세기 후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서유럽에서 일어난 문화계의 큰 변화라고 믿어지는 것이다. 각 세기별에 따라 이탈리아어로 트레첸토(trecento, 300), 콰트로첸토(quattrocento, 400), 친퀘첸토(cinquecento, 500)라 부른다. 르네상스의 기본적인 성격은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복원을 추구한다. 흔히 문예 부흥으로 번역된다.

르네상스의 의미

용어 르네상스의 의미는 '재생', '부활'이며 그 어원은 조르조 바사리의 책 "예술가 열전(1550)"에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작품을 해석하면서 그리스와 로마의 재림이라 하여 이탈리아어로 리나시타(rinascita, 부활)이라 한 것이다. 이것을 프랑스의 역사가였던 쥘 미슐레(1798~1874)가 '르네상스(Renaissance, 재탄생)'(re, 다시 + naissance, 탄생)으로 번역하고, 스위스의 역사가였던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확실하게 정의 내린 것이다(1860). 부르크하르트는 인문주의자들이 신이 모든 것의 중심인 기독교의 신본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이 모든 것의 척도였던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시절로 회귀하려 한 운동, 즉 인문주의(humanism)이라고 해석했다. 다만 르네상스식 인문주의가 '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인간'을 의미한다는 해석에는 오늘날 많은 반론이 쌓여있다.

르네상스 개념에 대한 비판

오늘날에는 르네상스를 어떤 '정신'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더이상 지지받지 않는다. 즉 르네상스는 '그리스도교 정신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무언가', '그리스-로마 고전에 대한 무언가'라기보다는 그냥 간단하게 '근대 초'라는 것이다. 르네상스를 하나의 정신으로 바라보는 것은 19세기식 개념인데, 여기서 제시되는 소위 '정신'이라는 것을 뜯어보면 제한적 민주주의, 교회에 대한 회의주의, 예술과 문학의 힘, 유럽 문명의 승리 등 19세기 유럽 사회의 이상형에 부합한다. 즉 소위 르네상스 '정신'이라는 것은 19세기 유럽인이 생각하던 '예쁜 그림'을 근대 초의 유럽에 투영하여 인식한 것이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발전한 이유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이탈리아 반도의 국가들은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문헌들과 지식이 보관되고 있었던 중세 로마인 동로마 제국과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탈리아 반도였을까? 첫째, 이탈리아 반도는 로마제국의 중심지였고, 그 전통이 기독교 세계로 편입된 이후에도 남아 있었다.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로마 유적만 봐도 알 수 있듯 고대 로마의 문화는 여전히 이탈리아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또한 오랫동안 동로마 제국과의 활발한 교류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파괴되었던 고대 로마의 문헌과 기술력을 거의 복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슬람 제국에 의해 동로마가 멸망했을 때 서방으로 피난한 동로마 예술가 기술자 등 지식인 대부분이 이탈리아로 향했다. 둘째, 중세 유럽을 지배하고 중세 사람들의 삶을 결정짓던 대표적인 체제인 봉건제가 유독 이탈리아에서는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반도가 나폴리와 교황령을 제외한 수많은 도시국가와 소국들로 분열되어 강력한 군주가 나타나지 못했던 것이다. 교황령의 존재도 이탈리아 지역을 안정적(?)으로 가르는데 영향을 주었다. 한편 유럽 중심지에서는 영국령 프랑스령 사이 백년전쟁(1337~1453), 산간 도서 밀라노 지역을 제외한 유럽 본토의 중세 흑사병(1346~1353) 등으로 인해 문화 부흥은커녕 인구수가 갈려나가고 있었다. 셋째, 12세기부터 이탈리아의 각 도시들은 무슬림 해적을 소탕하는데 성공을 거두었고 그 후에 지중해를 장악하여 중계무역의 중심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중계무역 특성상 여러나라의 문화에 대한 접근성이 높기 때문에 많은 문물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도시의 상인들은 부와 힘을 얻고 교양과 문화적 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상인들은 특유의 이해타산적 계산으로 인해 기독교 등 종교의 꼬드김, 상업에 방해가 되는 윤리적 규범에도 넘어가지 않았고(심지어는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아군을 패며 한몫 두둑이 챙기기도 하였다.), 자신들과 비슷한 속성(자신의 재능을 기반으로 성장한 인물)의 직종들인 예술가, 철학자, 인문학자, 수학자들에게 큰 후원을 해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많은 예술가들이 여유롭게 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넷째, 아비뇽 유수(1309~1377)가 끝나고 로마로 돌아온 교황은 교권을 다시 세우고, 황폐화 된 로마를 재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와의 이탈리아 전쟁(1494~)으로 북부 이탈리아가 털리기 시작할 즈음 율리오 2세(1503~)는 교황령 확대를 꾀하며 전쟁에 나선다. 막대한 군자금이 필요하므로,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막대한 헌금(면죄부)을 끌어들였으며, 또한 이 돈으로 이탈리아 각지의 유명한 르네상스 기술자들을 로마로 불러들여 천지창조, 아테네 학당 등이 제작되었으며, 더 나아가 성 베드로 대성당(공사기간: 1506~1626) 등을 재건하기에 이른다. 중세의 끝에 논란이 있고, 중세가 끝났는데 교회의 권력이 오히려 더 강해 보이는 이유, 그리고 르네상스가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복원을 추구한다면서 역설적으로 가톨릭 분위기가 풍기는 르네상스 작품들이 다수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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